(서울=파이낸셜리더스) 이수민 기자 =
'미쓰백'부터 '82년생 김지영'까지 'n차관람', '영혼보내기' 가속화
현대인들의 소비가치를 드러내는 '미닝아웃' 열풍과도 무관하지 않아
영화를 대하는 관객들의 소비문화가 달라졌다. 최근 극장가에서 부쩍 활발해진 ‘영혼 보내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좋아하는 영화의 흥행을 바라는 마음에 심야·조조나 선호도가 떨어지는 자리를 구매해 직접 관람하지 않고 자신의 영혼만을 보낸다는 의미다. 사회적인 변화와 가치 기준에 발맞춰 변화한, 2019년 가장 눈에 띄는 소비문화가 아닐 수 없다.
<미쓰백>이 쏘아올린 공, <82년생 김지영>으로 이어지다
지난 23일 개봉한 영화 <82년생 김지영>으로 또 한 번 극장가에 영혼 보내기 바람이 불었다. 2016년 출간 이후 100만부가 넘게 팔리며 베스트셀러에 등극한 동명의 소설(작가 조남주)을 원작으로 한 <82년생 김지영>은 82년생으로 30대 전업주부인 김지영의 삶을 통해 여성들이 경험하는 차별 문제를 그려 큰 공감을 얻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남성을 가해자료 묘사해 젠더 갈등을 조장한다는 쓴 소리도 나왔다. 급기야 성(性)대결로 과열된 분위기 속에서 일부 여성들은 지지의 목소리를 높이며 'N차 관람', '영혼 보내기'에 힘을 보탰다.
지난 8월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평화운동가 고(故) 김복동 할머니의 삶을 그린 영화 <김복동>이 개봉하면서 ‘영혼 보내기’가 화제였다. 단순히 지지의 의미 뿐만은 아니었다. 개봉 초반에는 좌석 판매율이 영화의 상영 기간, 점유 등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 각종 SNS와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여성 관객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김복동>을 응원하는 티켓 후원이 이어졌다. 그 결과 <김복동>은 상영 약 한 달 만에 약 8만 2천 명의 관객을 동원, 다큐멘터리 독립 영화로는 드물게 흥행성과를 얻었다.
‘영혼 보내기’가 본격화된 것은 한지민 주연의 지난 해 10월에 개봉한 영화 <미쓰백>.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아동의 연대를 담은 <미쓰백>은 여성 서사 중심이라는 이유로 투자와 배급 문제에 직면했고 개봉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 같은 사실이 젊은 여성들의 지지를 얻었고 곧 영혼 ‘보내기’ 운동으로 이어졌다. 결국 <미쓰백>은 손익분기점을 달성했고 주연배우 한지민은 그해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미쓰백>으로 촉발된 이 운동은 <항거: 유관순 이야기>의 100만 돌파, <걸캅스>의 손익분기점 돌파, <캡틴 마블>의 흥행으로까지 계속됐다.
페미니즘 이슈와 직결? 한계점 지적도 잇따라
앞선 영화들의 공통점은 여성 감독의 작품이거나 여성 배우들로 이뤄진 여성 위주의 서사인 작품이라는 것. 페미니즘이 강하게 내포된 소비 형태라 볼 수 있다. 국내에서는 여성 영화 개봉이나 흥행이 어렵기 때문에 여성 관객들을 중심으로 시장을 보존하려는 방어 활동 측면이 발동한 것으로 보인다. 관객의 적극적인 의사 표현의 방법이자 새로운 문화운동이라는 일환의 긍정적인 시각도 있다. 지속적으로 계속될 경우 여성 영화 증대 및 여성 영화인들의 처우 개선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의미 있는 운동이라는 평가다.
반면 부정적인 의견도 뒤따른다. 일각에서는 관객수 위주로 집계되는 박스오피스 공식 데이터가 왜곡될 수 있다는 점, 장기적으로 여성 영화의 질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즉 이런 방식은 실질적인 문화적 영향력을 키우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변영주 감독 또한 <김복동> GV에 행사에서 ‘영혼 보내기’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를 연출한 적 있는 변 감독은 “측은지심 때문인지 ‘영화 보러 갈 시간이 없으면 표라도 사서 돈이라도 내자’는 의견들이 나온다”며 “그런 식의 티켓 구매는 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김복동 할머니는 피해로서의 불행을 이겨내고 인권문제를 위해 싸웠던 분이다. 그런 삶을 살았던 할머니를 동정하지 말고 ‘깃발’로 함께 만드는 관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새 소비습관 ‘미닝아웃’ 열풍과 맞물린 열풍
‘영혼 보내기’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미닝아웃(뜻이나 가치를 뜻하는 미닝(meaning)과 사회적 소수자가 벽장에서 나온다는 의미의 커밍아웃(coming out)을 합성한 신조어) 문화와 무관하지 않다. 이들은 동물복지나 환경 보호, 페미니즘 등 자신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소비함으로써 정체성을 표현한다. 단순한 물건 구매부터 미디어를 소비하는 행위까지 다양하다. 아무리 성능이 뛰어나거나 인기 있는 상품이라도 자신의 추구하는 가치에 배반한다면 단호하게 불매운동을 벌인다. 자아의식이 강하고 의견과 취향을 드러내는 데에 익숙한 2030 젊은 세대들의 요즘 트렌드와도 맞물린다. 요즘 세대들의 의사표현이자 현대판 시위인 셈이다.
이 흐름에 발맞춰 시장도 타깃을 공략하고 있다. 마리몬드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기리며 피해 할머니의 작품을 모티프로 한 상품을 선보였고 탑텐은 지난 8월 독립 운동가를 활용한 광복절 캠페인 티셔츠를 출시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소비를 촉구하고 인증하며 독려하며 하나의 트렌드를 만들어나가는 이 같은 소비 형태는 장기적인 문화 형태로 계속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