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파이낸셜리더스) 전병호 기자 = 택시가 역삼동 수목 전시장 앞에 도착했다. 큰 애 둘은 학교(역삼초등)에 가서 좀 더 놀다 오겠다고 했다. 그리하라 하고 막내딸을 업은 이모와 함께 먼저 비닐하우스로 돌아왔다. 얼굴과 손발을 씻고 하우스 안에서 쉬고 있는데 담장 쪽에서 애들이 담장을 뛰어넘어 오는듯한 인기척이 들렸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하우스 문을 열고 나가 보니 큰 애 둘이서 막 담장에서 뛰어내린 자세로 엉거주춤 서 있었다. 너희들 왜 담을 타고 넘어왔냐고 야단치며 물었다. 그때 큰아이가 했던 말이 지금도 가슴에 못이 박혀있다. " 아빠, 저 길로는 못 들어 오겠어요" 바깥 도로에서 비닐하우스 쪽으로 들어오는 진입로를 가리키며 울먹이던 그 말을 나는 평생 잊어버릴 수가 없다. 어린 마음에 비닐하우스에서 산다는 사실이 너무나 싫고 힘들었던 모양이다.
담장 건너 연립주택에 사는 것처럼 주택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가 담장을 타 넘고 들어온 것이다. 그때 비로소 알았지만 아이들이 학교에 가거나 밖에 놀러 갈 때도 늘 그렇게 담장을 넘어서 들락날락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날(어린이날), 일을 마치고 밤늦게 돌아온 집사람과 아이들을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연초부터 공사를 수주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었다. 비닐하우스에 산다고 주눅 들지는 않았다. 각오하고 나서니 그런대로 견딜만했다.
태연하게 사람들을 만났다. 로비한답시고 술도 많이 마셨다. 그런다고 일(큰일)이 금세 손에 잡히는 건 아니었다.
다행히 지난해부터 '턴 키'방식으로 접근하여 무상으로 설계해 주었던 삼천포화력발전소 조경 및 준공대비공사가 3월 초에 발주되어 도급업체인 한라건설로부터 지명입찰에 참여토록 요청을 받았었다. 결국, 돈이 될만한 식재 공사는 도급업체와 관계가 깊은 D 회사가 가져갔고, 우리 회사는 단종(식재 공사) 면허가 없다는 이유로 까다롭고 이윤이 박한 준공기념탑설치공사와 부대시설을 맡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한전 측에서 끝까지 도움말을 해 줘서 받았지 그러지 않았으면 이 일조차도 못 받았을지 모른다. '실력과 성의'라는 두 팻말을 달고 '실성'한 사람(?)처럼 돌아다니는 내가 측은해 보이기도 했고 한편 대견스러워 보이기도 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끝까지 의리를 지켜 주었고, 그럴수록 나는 일을 더욱 잘 수행하기 위해 매월 2회 삼천포 현장에 내려가 일주일 정도 머물며 박수현 소장을 도와 작업을 독려했다. 그런 가운데 어린이날이 되어 아이들을 데리고 뚝섬에 다녀온 그 날 나는 자신의 불행보다 더 큰 자식들의 아픔을 깨닫고 부모로서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우리 내외는 열심히 일했다. 이를 악물고 일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철이 되자 일감도 제법 많이 늘었다. 한전 공사는 거의 나 혼자서 관리했고 나머지 대부분의 일은 집사람이 직원들을 데리고 직접 실무를 맡아 일을 했다. 작업의 수준과 전문가적 역량이 점점 더 크게 향상되는 걸 느꼈다. 집사람을 칭찬하고 직원들을 격려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사내 분위기가 안정되었을 뿐 아니라 회사에 대한 주변의 신망도 매우 높아졌다.
그러나 우리 내외가 비닐하우스 생활을 하면서 사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직원들도 함구했지만, 그 어떤 사람도 우리 하우스에 데리고 온 사람이 없다. 심지어 부모 형제들조차도 전혀 모르게 했다. 교인들만 몇 분 고정적으로 심방을 와서 기도를 해 주고 간 게 까짓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10월 초 추수감사절이 다가왔다. 토요일 저녁에 식사를 마치고 책을 읽고 있는데 집사람이 "동엽이 저거 아부지요"라고 불렀다.
우리 내외는 쑥스러워서 서로 '여보, 당신' 소리를 못 했다. 왜 그러냐고 반문하듯 쳐다보고 있는 나에게 집사람이 이렇게 찬찬히 말했다.
"내일이 추수감사절인데,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이만큼 안정이 되었으니 내일 추수감사절 헌금을 좀 하고 싶어요."
그리하라고 순순히 대답했다. 그동안 결혼하고 자식을 키우면서 (나는 교회에 나가지 않았지만) 집사람과 아이들이 교회 가는 걸 한 번도 막아본 적이 없다. 그것은 내가 착해서라기보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지극히 기본적이고 보편타당한 철학적 상식에 따랐을 뿐이다.
그다음 날 저녁밥을 먹고 난 다음에 또 집사람이 "동엽이 저거 아부지요"라고 나를 불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오늘 교회에 추수감사절 헌금을 드렸고 그동안 몇 년간 제대로 헌금을 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마음먹고 좀 많이 했노라고 했다. 나는 고개만 끄덕이며 알았다는 표시를 했다. 그러자 집사람이 다시 한번 나를 빤히 쳐다보며 추궁하듯 말했다. "얼마 했냐고 왜 안 물어보세요?" "물어보면 뭐하나. 헌금했으면 됐지." "그래도 한번 물어봐요" 그래, 얼마 했어?" 그러자 집사람이 정색하며 대답을 했다. "헌금…. 오백만 원 했어요." 나는 그 순간 해머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눈앞이 캄캄해지고 머릿속에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는데 아내가 내 손을 잡아 이끌더니 "미안해요…. 고마워요."라고 하면서 눈물 젖은 얼굴로 내 품에 안겨 왔다. 말없이 눈을 감은 채 몸을 맡긴 아내를 엉거주춤 끌어안고 있다가 이윽고 나는 오른손으로 그의 등을 토닥거리며 입을 뗐다. "어쩔 수 없지 뭐. 우야겠노. 이미 헌금을 했다는데…. 잘했어. 잘했어요" 그때 헌금한 오백만 원은 당시 비닐하우스에 살며 어렵게 저축해 온 전 재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날 밤 우리 내외는 또 한없이 부둥켜안고 울고 또 울었다. 아!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4.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말하면 혹자는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해 추수감사절 이후 분명히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세 가지 특이점들이 나타났다. 우선 한가지, 집을 이사하게 됐다. 10월 중순, 삼천포화력 준공대비공사를 마무리하느라 바빴을 때다. 삼천포 현장에 있는데 집사람한테서 전화가 왔다. 그동안 1년 가까이 우리에게 전기와 물을 공급해 주었던 옆집 태화연립 104호에서 자기 집을 사지 않겠냐는 연락이 왔다는 거다. 나는 두말하지 않고 일반시세보다 높지 않으면 무조건 사도록 하라고 일렀다. 그 다음 주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바로 계약을 했고 두 달 후 12월 중순에 이사를 마쳤다. 비닐하우스 생활 13개월 만에 밑바닥을 딛고 정상적인 생활의 무대 위로 기어 올라온 셈이다. 참으로 감개무량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기쁘고 감사했던 것은, 그해 크리스마스를 새로 이사한 집에서 교회 식구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된 일이다. 집사람도 그랬지만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행복감을 느끼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랜만에, 진실로 오랜만에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즐겁고 기쁜 성탄절을 맞이한 것이다. 그날 우리 내외는 큰 애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특별한 제안을 했다. 아이들의 공부와 생활습관 지도를 위해 가정교사를 채용해 주기로 한 일이다. 아이들은 물론 좋아했다. 다름 아니라 S대 공대를 다니며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던 8촌 조카에게 미리 부탁했었다. 조카는 그 후 석박사 과정을 다 마칠 때까지 아이들 셋을 잘 지도해 주었다. 우리 내외가 건설 분야 직업상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 늦게 들어오는 일이 많아서 아이들에게 늘 미안했는데, 조카가 함께 생활하게 됨으로써 아이들의 성장 과정과 훈육에 큰 도움이 되었다.
두 번째로, 10월 말경 오랜만에 현대건설 토목부에서 전화가 왔다. 바쁘지 않으면 한번 본사를 방문해 줬으면 좋겠다는 연락이었다.
3년 전(1979년) 아산화력발전소 준공대비공사를 마친 후 그동안 특별한 프로젝트가 없었지만 그래도 인간적인 친교는 계속해오던 참이다. 무슨 일인가 하고 가 봤더니 공무를 담당하는 P 부장이 울산에 있는 현대건설 영남지사(본사 토목부에서 관장)로부터 올라온 품의서를 보여 주었다. 공문을 보니 '부산충혼탑건립공사'의 하도급을 맡을 작업반(하도급업체)을 결정하여 이른 시일 내 현장에 투입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